너희는 살면서 아무 이유가 없거나
앞으로도 영영 이유 같은 건 찾지 못할 일들을 수없이 하고 있으며,
심지어 잘할 수 있는 존재이다.
너희는 아무 이유 없는 행동을 하며 행복해한다.
이유 없는 행동을 이유 없이 하다가 이유 없이 성장한다.
그것이 내가 지난 세월 수도 없이 보아온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 도대체 <도대체의 이야기 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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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공원이 가까웠던 마포구 합정동에서 고양시로 이사 오고 난 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30여 년이 넘은 아파트들 사이사이마다 걷기 좋은 공원들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동네에서 보기 힘들었던 어린 아이들이 맘껏 뛰노는 풍경은, 저출산을 걱정하는 시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리둥절했고요.
그 공원들에는 대략 10미터까지도 쭉쭉 뻗은 큰 나무들이 가득합니다. 한겨울을 지나는 1월인 지금이야 나무들이 저마다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흑백영화 속 풍경을 그리지만, 얼마 안 있으면 연한 초록빛이 고개를 들고 조금씩 색을 더할 준비를 할 겁니다. 어느새 이곳에서 맞하는 여섯 번째 봄을 기대하게 되네요.
사람들이 쉴 틈 없이 오가는 공원길에, 오래 그 자리를 지킨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동네 고양이들이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캣 타워가 되어주기도 하고, 까치가 둥지를 틀어도 괜찮은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하고요. 매일 저마다 다양한 삶의 고민들을 끌어안고 마음을 달래려 걷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나무는 어떤 생각 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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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에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 고수리 작가님 편을 듣다가, 그 다음 소개된 책 속 문장을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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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산에 있는 나무들이 나뭇잎을 떨굽니다.
산은 그제야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능선과 골짜기를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겨울은 나무를 가장 정확히 볼 수 있는 계절입니다.
풍성한 녹음도 화려한 단풍도 모두 진 나무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
계절이 바뀌어도 변치 않을 나무 그대로의 모습을요.
우리도 우리가 약해졌을 때 겨울나무와 같이 그대로의 가장 정확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 한동일 <라틴어 인생 문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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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해진 나뭇가지를 보면서, 풍성한 봄여름의 나무만을 그리워했던 나의 생각을 한순간에 바꿔버린 이야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느다란 선들로 뻗은 가지들은 저마다의 방향과 모양으로 한 나무의 몸집을 만들고, 아름다운 면을 품고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찬찬히 보고 있으려니,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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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부끄럽다고,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면서 나 스스로에게 이런 실수를 하는 건 아니라고 다그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매일매일 이렇게 게을러도 되는 거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새해에 두 권의 책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참 성실하다”는 말을 들어도 나를 모르니까 저런 칭찬을 해주는 거야, 하고 타인의 판단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나에게 자비로워지기. ‘자기자비’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더라고요. 누구보다도 내가 나를 잘 안다는 관념부터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적정 거리를 두고 나의 삶을 바라봐주는 이들이 이야기해줄 때, 비로소 나의 궤적이 보일 때가 있죠. 그리고 그건 오랜 시간을 들여 바라본 덕분에 얻어진 귀한 통찰이기도 하고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고요히 지켜보는 나무처럼, 나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놓치 않고 저마다 걸어온 길을 이해해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새해를 빌려 다짐을 해봅니다.
출근길에 읽다가, 필사하고픈 시 하나를 발견해 이번 레터 닫는 글로 옮겨둘게요.
곁에서 마주하는 나무들과 눈빛으로 인사하는 시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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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여린 나무가 거기 서 있다, 우리가 사라지고,
우리 시절의 시끄러운 위대함과
끝없는 곤궁과 미친 불안감이
잊힌 다음에도 거기 서 있을 테지.
높새바람이 나무를 휘게 하겠지. 비바람이 나무를 잡아채고,
태양이 미소를 보내고, 촉촉한 눈이 내리누르겠지.
방울새와 딱따구리가 그 나무에 살 거고
나무 발치에서는 조용한 고슴도치가 땅을 후벼 팔 테지.
나무가 경험하고 맛보고 당하는 일들,
세월의 흐름, 바뀌는 동물 종족,
압박, 치유, 바람과의 우정과 해와의 우정,
그 모든 것이 날마다 속살거리는 나뭇잎의 노래되어
나무에서 흘러나올 테지, 그 다정한 우듬지를
요람처럼 흔드는 친절한 몸짓에서도, 잠에 취해 매달린
봉오리들을 촉촉이 적시는 수지의 달콤한 향기에서도,
나무가 만족스럽게 저 자신과 놀이하는
빛과 그림자의 영원한 놀이에서도.
- 헤르만 헤세의 시 <일기 한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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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단 한 사람> (한겨레출판)
지금으로부터 12년 전(후아.. 세월이...), 저는 한겨레출판 국내문학팀으로 입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인생 최초로 마주한 소설가님이 바로 최진영 작가님입니다. 소설가, 도 분명 직업인데, 한겨레문학상을 읽기만 해왔던 독자로서 그날은 최진영 작가님의 뒤로 어떤 신성한 빛이 감싸고 있는 듯한 후광을 본 것도 같습니다.
최진영 작가님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2010)을 읽은 이후로, 저는 작가님의 팬이 되어 지금까지 모든 작품을 읽었습니다. (팬심 고백) 지금이야 스테디셀러로 인기가 있는 <구의 증명>(2015)은, 장강명 작가님의 프로젝트 전자책 <한국 소설이 좋아서>(2017)에 사심을 가득 담아 추천하기도 했었습니다. 좋은 작품이 끝내 알려지고 사랑받게 되어서 기쁩니다.
작년 9월 말에 출간된 <단 한 사람>을 새해 첫 주에 읽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프롤로그에는 작은 섬에 피어난 작은 나무 두 그루가 등장합니다.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같은 속도로' 자란 두 나무는 300년이 지나고 다시 300년이 지나고, 점점 뿌리는 엉키고 한 나무처럼 되어 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발로 걷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강렬한 도입부터 저를 휘감아버린 이 소설은 할머니, 엄마, 그리고 이란성 쌍둥이 중 하나인 목화, 이후로 목화의 조카 루나의 이야기까지 이릅니다. 읽던 중간중간에 소름이 돋아서, 멈칫하면서도 책장이 줄어드는 게 아쉬워서, 가까스로 결말을 미뤄두고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최진영 작가님의 작가의 말을 빌려오며, 어떤 스포도 하지 않고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즐거웁게 읽어주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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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매일 저녁 산책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날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산책길에 팽나무(제주에서는 '폭낭' 또는 '퐁낭'이라고 부릅니다) 군락지가 있었고, 나무들의 수령이 적혀 있었습니다. 수령은 대개 300년이 넘었습니다. 300년 동안 나무는 그곳에서... 다 봤을 겁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악행을, 나약함을, 순수함을, 서로를 돕고 아끼는 모습을, 사랑하고 기도하다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린 찰나의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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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도대체의 이야기 집> 제목 확정
2월에 출간할 도대체 작가님의 소설집 제목을 정했습니다. 다양한 분위기의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면, 이 소설집이 마치 이야기 주머니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본격적으로. 하는 느낌으로 이야기집(모음집)과 동시에 이야기로 지은 집(HOUSE) 라는 생각에 떠올린 제목입니다.
오늘 레터의 주제가 된 '나무'에 대해, 도대체 작가님의 소설 중 하나인 <나무 앞에서>에서부터 저의 글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세월을 헤아리지 않아 수령을 알 수 없는 크고 웅장한 은행나무의 말을 바람을 빌려 받아 적은 이야기... 너무 궁금해지죠? 열심히 작업해서 선보일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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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 EP84. 동계 곳간털기 (ㅎㅇ&에디터리)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호스트 두 사람이 각자 연말연시에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 어떤 도서를 소개할지 사전에 공유하지 않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한 권도 겹치지 않았고 여섯 권을 펴낸 출판사도 모두 달랐다는 기적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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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시스템이 바뀌었습니다.
페이지를 누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게시판이 열려요. 보다 쉽게, 서로의 피드백을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2024 새해부터 변경되었음을 알립니다. 위트보이와 에디터리의 답장도 그 밑에 답글로 달아둘게요. 이번 주 답장도 잘 부탁드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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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유유히 레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 레터는 위트보이 님이 보내드릴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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