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파랗고 맑습니다. 요 며칠 비를 맞고 자란 맞은편 단지의 큰 나무들은 부지런히 쑥쑥 더 자란 듯, 키만큼 너른 그림자를 드리워주고 있어요. 이런 날씨면 어디든 끝없이 걷고 싶어집니다. 매일 익숙한 길 말고 새로운 곳으로, 시끄럽게 달리는 자동차 소리 들리지 않고 와글와글 떠드는 사람들이 없는 고요한 곳으로.
여행 하면 걷기, 를 자동으로 떠올리는 저는 걷는 사람을 위한 길이 많은 곳이 좋아요. 합정, 망원, 서교동 골목골목도 좋지만, 걷다가 보도블록이 울퉁불퉁해서 몸이 절로 한쪽으로 기울거나 툭 튀어 나온 무언가가 발에 걸리거나 인도에 내놓은 광고판을 피해서 걷는 게 불편해졌어요. 그래서 그쪽 동네에 살 때면 한강을 주로 찾았습니다.
일산으로 이사를 오니 단지 사이사이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공원들이 반겨줍니다. 지하철역까지 제법 먼 집이지만, 20분쯤 걷는 길도 큰 나무들 뻗어나가는 멋진 가지들 살피고, 화단 구석 어딘가 숨어 있는 냥이들과 눈맞춤하고, 때 되면 피어나는 꽃들 이름을 궁금해하며 걷다 보면 금방 도착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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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닮아 길눈이 밝은 저는 어디든 한 번 걷고 나면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집니다. 이렇게 저렇게 돌면 여기였지, 하고 생각한 대로 걸으면 찾던 곳이 짜짠 나타납니다. 이런 저라서 새로운 곳에 자꾸 가고 싶나 봐요. 다 아는 거 말고 또 모험할 길을 나에게 던져줘. 익숙한 풍경 말고 우와, 탄성이 절로 나올 어떤 걸 기대하며 걷는 길을 말이죠.
인생 첫 배낭여행은 대학교 4학년이 올라가기 전, 1월~2월 한 달 간 떠난 프랑스 여행이었습니다. 네, 그 비수기에(비행기표가 싸니까요), 우중충하고 우울함에 잠식되어버릴 것 같아 다들 어디론가 따뜻한 곳으로 떠나버려 텅 빈 듯한 파리에서, 저는 한없이 바닥을 쳤습니다. 갑작스레 내리는 우박을 피하려 황급히 어딘가 건물 밑으로 피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 햇빛을 드러내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었습니다.
아직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하지 않은 제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타지에서 보낸다는 건, 여행의 낭만보다 절대적 고독감을 맛보는 시간이었죠. 뭘 해도 재미없었고(혼자니까 쉽지 않지), 불문과 전공인데 불어를 하면 비웃는 파리지앵들(요놈들...). 다행히 파리의 2주는 과 선배와 함께 숙소를 쓴 덕분에 저녁이면 따뜻한 기운을 충전했습니다. 감기 기운이 돌 때 따뜻한 민트차 한 잔이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지도 그때 처음 알았고요.
그러다 지방 도시로 가서는 너무 말이 하고 싶어서, 유스호스텔 카운터를 찾아가 한국인들 방 번호 좀 적어달라고 해서, 방마다 두드리고 사람을 찾았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참 절박했네요 ㅎㅎㅎ). 그렇게 인연이 된 언니를 만났고, 길가에서 한국인처럼 보이는 분에게 다가가 “혹시 한국인이세요?” 대뜸 물어보며 하루 여행 메이트를 만나기도 하고, 유스호스텔 배정받은 방에서 한국어로 된 책을 발견하고 그 책의 주인이자 제 룸메이트가 된 사람을 두근거리며 기다리기도 하고, 베네수엘라에서 온 최강 친화력을 자랑하는 동생도 만나고, 이렇게 남은 여행을 누군가를 발견하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그 첫 배낭여행에서 알았던 것 같아요. 아, 어디를 가든 내가 구하면 누군가가 나타나는구나. 마치 하느님이 적재적소에 천사를 배치해준 듯, 타인의 호의와 선의로 하루하루를 건너갈 수 있는 거구나. 내가 받은 고마움을 나도 누군가에게 베풀 기회가 있을 때 그대로 갚아줘야지, 하고요. 그렇게 무사히 첫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두 번째, 세 번째 여행을 또 떠나고, 어느 도시든 걷고 또 걷고 하염없이 걷다가 숙소로 지쳐 돌아오는 게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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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프라하, 존 레논 벽에는 매일 그림이 지워지고 그려진다는데요, 저와 만난 그림은 저 벽화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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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구글 지도도 없는 시절의 배낭여행을 떠올린 건, 지난 2주 동안 저는 유유히의 두 번째 책 여행 에세이 엔솔로지 편집 작업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하는 10인의 작가님들 모두 무사히 마감을 하셨고, 초교 작업을 하고 작가님들과 피드백을 주고받고, 이제 디자이너님께 원고를 넘기기 직전이랍니다.
원고를 처음 받았을 때, 메일로 도착한 원고를 다운받고 여는 순간까지 심장이 요동칩니다. 어떤 글을 써주셨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간 끙끙 고민하셨을 작가님의 시간이 저에게 도착했기 때문에, 얼른 읽고 저의 감상을 나눠드리고자 서두릅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개성을 듬뿍 담은 에세이는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하나 드렸을 뿐인데, 각자 가진 필터를 통해 다양한 색이 쏟아졌습니다. 초교와 더불어 원고 퇴고 방향을 조심스럽게 요청드리기도 하고, 작가님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 내용을 가지치기해서 보내드리기도 하고, 글의 제목을 함께 고민해서 결정도 하고요. 이렇게 원고 하나를 두고 작가님들과 주고받는 메일은, 책을 함께 만들고 있음을 느끼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이제 일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실감도 나고요!
6월 초 출간을 위해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유유히의 두 번째 책, 다음 주에는 아마 출간 전 이벤트를 소개해드릴 수 있을 거예요. 이 즐거운 책을 어떻게 독자님들에게 선을 보일지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입니다. 10명의 작가님들도 너무 궁금할 텐데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즐거운 소식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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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NETPLEX)>
잔인한 것을 그만 보고 싶어서(드라마 <괴물>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끝까지 잘 봤어요) 헤매던 중에, 넷플릭스 새 시리즈가 떠서 흥미가 당겼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이 언니, 케리 러셀의 미간 주름이 매력적이었고요. 올초 덴마크 정치 드라마에 홀딱 빠졌던 터라(지난 뉴스레터 ep1을 참고해주세요 ㅎㅎ), 제목부터 <외교관>이라니, 흥미진진했죠.
이 드라마는 이란 통으로 알려진 케이트가 하루아침에 영국 외교관으로 발령이 나서 런던으로 향하게 됩니다. 능력자인 케이트 혼자이면 참 좋은데, 혹처럼 남편이 달렸습니다. 매우 정치적이고 뒤에서 판을 깔아놓고 능수능란하게 상대 뒷통수를 치는 전문가죠.
총 8화로 끝이 나서, 한 주간 행복하게 시청했습니다. <웨스트 윙> <홈랜드> 제작진이 만들었다는 건 다 보고 알았는데요, 역시 한 분야를 파고든 제작진들은 90%의 배경에 10%(한 스푼)의 신선한 소재를 넣어 다시 흥행에 성공하네요. 무엇보다 가장 통쾌했던 장면은 케이트와 남편의 부부싸움인데, 절대 놓치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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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훈 님의 채널 <빠더너스>의 인터뷰 코너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줄여서 '오당기')를 종종 봅니다. 배달음식을 시켜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콘텐츠인데요, 최근에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 원슈타인이 나왔더라고요(드라마 OST인 <존재만으로>를 무척 좋아합니다).
문상훈 님이 사전 조사를 하던 중에 원슈타인의 예전 인터뷰 내용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찾아보니 정확히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엄마, 나는 내가 하는 음악의 특성상 돈을 못 벌 것 같아. 그래서 나는 항상 내가 노숙자가 되면은 어떻게 살지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
너무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걸 포기하는 대신 노숙자로 살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 내 위로가 통한다면 좋겠다는 어린시절의 포부였는데요. <빠더너스> 인터뷰에서는 지금의 원슈타인이 덧붙입니다.
만화나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고 많이 배웠던 자신은 <원피스>의 루피처럼 무모한 이상을 꿈꾸고, 마치 결말에 가서 그게 다 이뤄질 걸 아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그것만 좋아하는 주인공에게 많이 배웠다고요. 길에서 지내게 되더라도 진짜 노래가 좋으면,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어쨌든 결과까지 가는 길이 다시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고요.
이 짧은 인터뷰가 제 맘을 쿵 하고 두드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잘될까, 돈 벌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나요?
그냥 하는 겁니다. 좋아하는 일은 그 앞에서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게 아니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곡으로 장기하의 신곡을 보내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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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부장님이 컨디션을 많이 회복했습니다. 콧줄을 고정시키느라 상처가 났던 콧등도 빠르게 아물고 있어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기! 잊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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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뉴스레터를 어떻게 읽었는지, 조금이라도 나누고픈 이야기를 전해주실 때마다 에디터리와 위트보이는 인류애가 솟습니다. 한 줄이라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편히 두드려주세요. :)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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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뛰는 날씨에 오늘 아침에도 여러 개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내 옷장은 왜 이렇게 빈곤할까 생각했어요. 사실은 짜임새 있게 쇼핑을 못 해, 어울리지 않는 옷들을 마구 사들인 제 탓임에도 불구하고요. 옷이라는 것이 단지 내 주머니뿐 아니라 지구 전체에 해가 된다는 걸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늘 그렇듯 저는 불편한 진실은 자주 외면합니다. 다시 한번 소중한 사실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해요. 지구를 위해서, 제 말도 안되는 하찮은 패션 따위야, 접어둘 수 있고 말고요.
_Agnes
☞ 수선 자국 전혀 티가 안 나는 걸요!!? 오히려 손 심심할 때 질감 느끼며 놀기 좋을 것 같은데!
_ㅇㄹㅅ
☞ 덕분에 브리타 정수 필터를 모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번 여름에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
_이태태
☞ 물욕을 줄이는 단한번의 외침 "환경 보호"!!! 가슴에 새겨봅니다 ㅎㅎ
_새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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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유유히 레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 레터는 위트보이님이 보내드릴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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