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없던 일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쁜 감정은 틀림없이 사라졌고 그땐 그런 더럽고 괴로운 일이 있었어, 하고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건 분명히 내 몸 어딘가에 있는 무슨 기관이 작동한 결과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선명하던 것들이 이렇게 감쪽같이 무뎌질 수가 있을까. 이런 것들을 오래 품고 있으면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나를 다시 안온한 상태로 되돌리는 역할을 맡은 어떤 기관이 열심히 일한 것이 분명했다.
- 이유리 <브로콜리 펀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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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어서도 변함없이 소설을 많이 읽고 있는 에디터리입니다. 새해에 새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만큼 부질없는 게 없고, 그저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동시에 어제보다는 조금 더 좋은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전부이겠죠?
이유리 작가님을 좋아하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복서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주인공이 나오는 표제작 <브로콜리 펀치>를 재밌게 보았습니다. 브로콜리로 변한 이유는 요즘에 생각이 많아서, 마음고생이 많아서 그렇게 된다고요. 속 시원하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처방법이 왜 이렇게 좋았을까요(언제 마지막으로 시원하고 소리를 질러보았던가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더불어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왜가리 클럽>이었어요.
<왜가리 클럽>은 반찬가게를 하다가 이유없이 망한 양양미가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양미는 사업이 망한 이유를 곱씹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도림천을 걷고 또 걷다가, 조용히 모여 왜가리를 관찰하는 모임인 '왜가리 클럽'에 들어갑니다. 멤버들과 별로 큰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없는데 자꾸 큭큭 웃게 되고 소설이 끝날 무렵에는 제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더라고요.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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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레터를 쓰고 저는 바로 제주로 2박 3일을 다녀왔습니다.
10년 전 방문했던 게스트하우스는 1년 연세로 운영하고 있는 주인 부부가 있었고요. 변하지 않은 외관에, 집안은 곳곳을 정성스레 손 본 흔적이 있더라고요. 예전엔 온돌방에 이불을 깔고 잤었는데 메트리스도 놓였고요. 제가 없는 사이에 이곳 냥이가 된 유채는 어느새 9살, 터줏대감처럼 거실 전기장판 위 방석에서 고롱고롱 잠을 평화로이 자고 있었고요.
또 잠시 머물러 온 주인 분의 선배님(범상치 않은 포스의 중년 여성)과 이제 막 한달살기를 하러 온 두 살이 넘은 리아와 리아의 엄마가 있었는데요. 알고 보니, 주인 두 분은 대학로에서 10년 이상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 적이 있던 분들이었고, 그중 미아님은 얼마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또 미아님이 선배라 부르던 분은 "저는 어린이책을 몇 권 썼어요"라고 별거 아니듯 말했지만 알고 보니 Why 시리즈부터 144종 이상을 쓴 남춘자 작가님이셨고요(저는 작가님의 포스에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할 수밖에요). ㅎㅎ
혼자 훌쩍 떠난 여행인데, 저녁마다 같이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데" 하며 직접 끓인 맛있는 동태탕도 떠주고, 함께 이야기 나누다 보니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밤 11시를 향하더라고요. 고요한 제주 서쪽 시골 마을 고산리에서 이런 우연으로 만난 인연도 참 신기하고 좋기만 했습니다. 혹시 고즈넉한 제주를 맛보고 싶다면 <제주에내집>을 검색해보시길요. 모든 것이 게스트를 위해 (티나지 않게) 편하게 놓여 있어 자연스레 마음을 풀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Mia "매일 바람을 체크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이폰 날씨 앱에서 바람이 5m/s 이하일 때만 뛰러 나가요. 제주 바람은 서울하고는 달라서, 막 이겨야 하는, 그렇게 생존해야 하는 바람이 아니예요. 오히려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바람, 살아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게 해요."
춘자 "맞아. 그리고 뭔가 가슴이 뻥 뚫려. 제주 바람을 맞다 보면은."
겨울의 제주 하면 일기예보의 기온보다 체감이 3~4도 더 내려가는 것을 상상해왔는데, 이번 겨울 제주의 바람은 매섭기보다 둥글둥글했고, 등을 잘 밀어주었네요. 뻥 뚫리는 바람이 밀어주는 바람에 모처럼 씩씩하게 걷고 석양도 보고 길 위에서 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여행의 묘미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잠시 포개어져 서로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나누고 다시 자기 갈 길로 가는 것. 그게 여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삶의 마법 같은 순간인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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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에 간 김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서점 100'에 독립서점 최초로 선정되었다는 <책방 소리소문>도 방문했어요. 중산간 마을에 덜렁 있는 서점이지만 사람들로 북적였고, 큐레이션이 너무 잘 되어 있는 서가는 반가웠어요.
오로지 책만 파는 서점인데, 누구나 한 권씩 책을 구입하고 안고 나가는 발걸음이 좋아보이더라고요. 서점만의 디자인으로 재킷을 씌운 리커버 에디션도, 예쁘게 포장해둔 블라인드북도, 시 낭독을 들을 수 있는 서가도 모두 좋았습니다. 서점의 모든 책들을 한번씩 눈길을 주다가 하미나 작가님 신작을 품에 안고 총총 나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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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도 없이 쫓기는 듯 속도를 높여 살다가, 한적한 시골 제주 길을 걷고 있다 보니까요. 이게 내 속도인데 뭘 따라가고 싶었던 거지? 어리둥절했습니다.
매번 쉼표를 크게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하루 잘 살았다,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그리 큰 게 필요한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잘 다독이고 싶어졌습니다.
올해에는 나를 위해 텅 빈 시간들을 자주 비워두기로 약속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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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닐스 (제주 제주시 한림읍 일주서로 5153)
제주 공항에서 고산리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달리다가, 창밖으로 창고처럼 생긴 저 로고를 만났습니다. 카페닐스!
제주 협재가 핫할 때부터 별표를 그려두고 찾아갈 날을 기다렸었는데, 카페가 닫고 잠잠하다가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었죠(제가 애써 찾지 않아도 누군가들이 소식을 전해주는 신기한 카페). 그렇게 우연히 만난 카페 닐스를, 도착 다음 날 오전부터 찾아갔어요.
그리고 어김없이 입 안 가득 꽉 찬 행복을 주는 한 잔의 커피.
널찍한 공간 구석 창가로 자리를 잡으니, 사장님이 오셔서 온풍기를 제 방향으로 슬쩍 돌려주고 갑니다. 말없이도 다정한 배려를 받고, 저는 카페라떼를 한잔 더 마시고 넉넉한 마음이 되어 위트보이와 함께 마실 원두도 구매하고 길을 다시 나섰습니다.
제주 서쪽에 가거든 이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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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나 <신이 떠나도> 2쇄 소식!
'무연'하다 여기던 사람들이 인연이 되어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 <신이 떠나도>가 2쇄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
지난 토요일(17)에는 대전 오케이슬로울리에서 마련해주신 북토크를 진행했는데요.
공간을 맡고 계시는 다다님이 뽑아주신 질문들을 나누고, 그 자리를 채워주신 독자들의 감상과 와닿은 문장들을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각자의 불행 / 다행 / 바람 을 적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이 자리에서만 털어놓을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반짝거립니다.
와주신 여러분께, 그리고 유유히 로고로 맛있는 쿠키까지 준비해주신 양다혜 대표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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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새해 첫 책은 비스카차 <이 땅에 ADHD로 태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등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온 만화 <이 땅에 ADHD로 태어나>를 책으로 묶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화책 작업이라 긴장 또 긴장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데요. ㅎㅎ;;;
실제로 비스카차 작가님은 병원 약국에서 일을 하다가 업무적으로 또 관계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정신과를 찾았고, 서른둘에 ADHD 진단을 받은 뒤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된 경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왜 ADHD는 진단이 없어도 나도 ADHD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성인 ADHD는 어떤 증상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일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을까 등등 작가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여전히 ADHD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하구나 깨닫게 됩니다.
특히 ADHD 진단을 받은 당사자인 작가의 이야기는 ADHD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고
효율을 강조하는 이 땅, 이 사회에서 힘에 부치는 경험을 하고 있는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꼭 필요한 조언을 건네줄 거예요. (무엇보다 저 스스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ㅎㅎ)
2월 출간까지 힘내보겠습니다. 얍!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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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유유히 레터는 여기까지입니다.
아래 답장하기 버튼을 누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게시판이 열려요. 보다 쉽게, 서로의 피드백을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위트보이와 에디터리의 답장도 그 밑에 답글로 달아둘게요. 이번 주 답장도 잘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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