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괜찮으시면 차 한잔하실래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없고 마침 제가 만든 허브차가 있거든요. 좋아하실 거 같아요.
왜 덜컥 주해 모녀를 따라나서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약국을 나와 어린 시절 지치도록 뛰어놀던 비탈길에 접어들 때까지도 그만 돌아설까, 약속이 있다고 말할까, 몸이 아프다고 할까, 망설이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조금씩 더 가팔라지는 그 골목을 반쯤 올라가고 나서는 그만 포기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p.45
-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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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김혜진 작가님 소설을 읽었습니다.
모두가 재개발을 기다리는 남일동에서 토박이로 살다가, 행정구역 변경으로 중앙동에서 살게 된 나, 홍이는 서른이 넘도록 자리를 못 잡고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중입니다. 으레 다니던 남일동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가, 딸 수아를 홀로 키우는 주해를 만나게 됩니다. 막 이 동네 달산 위쪽으로 이사를 온 참이었습니다.
약국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 주해는 어느 날 홍이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애잔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남일동에서도 가로등 하나 없고 마을버스도 없어 힘겹게 언덕을 올라야 하는 이 산동네로 이사와야 했던 주해의 사정을, 홍이는 굳이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홍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아를 돌봐주며 주해의 집을 다녀가는 사이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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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2학년 때인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즈음 같은 반으로 만난 친구 H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 소식도 모르고 지낸 지 20년인데 이 소설을 읽고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소설 속 주해가 주인공을 데리고 산꼭대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그 장면과 겹쳐진 모양입니다.
H는 마른 체격에 키가 컸는데 (당시에도 반에서 가장 작았던 저보다 10센티 이상 차이가 났던 거 같아요) 까무잡잡한 피부에 옅은 쌍꺼풀에, 조금 튀어나온 눈이 장난스럽게 보였어요. 누가 봐도 예쁘다 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의 매력이 있는 귀여운 친구였죠.
왜 이렇게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느냐면, 언젠가 방과 후 교실 창가에 나란히 서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던 중에 H가 펑펑 우는 거예요. 당황한 저에게 H는 자기가 너무 못생겼다고 속상하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등만 두드려주었던 어리둥절했던 그날, 햇빛이 내리쬐는 창가에서 H는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요.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한 남학생으로부터 H가 대시를 받는 상황을 목격합니다. 그러니까.. 너 왜 울었냐고...) H에 관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입니다.
돌이켜보면 자신이 예쁘지 않다고 울었던 데에는 반에서 소위 말하는 ‘노는 애들’ 사이에 끼지 못했던 게 이유였으려나 싶어요. 2학년이 되니 조금씩 무리를 짓고, 선배들을 찾아가 ‘X동생’이 되는 아이들이 생겼거든요. 그중 우리와 같이 놀던 한 친구 S가 있었고요. 같이 떠들던 웃음 많던 S에게서 어느 날 희미한 담배 냄새를 맡았을 때, 순간 얼어붙었던 제 새가슴도 생각납니다. 선생님께 들켜서 혼날까봐 제 목이 다 움츠러들던 기억.
다행히도 그 무리에 끼지 않은 H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저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집안 형편상 꺼낼 수 없는 말들이 쌓여가는 답답한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우리 집 사정이라면, 청원 경찰로 3교대를 하는 아빠와 이모네 한의원 탕약실에서 한약을 달이고 포장하느라 열기와 씨름하며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오는 엄마가 부지런히 두 딸을 위해, 생계를 위해 일했습니다. 저는 챙김보다는 혼나지 않기 위해 알아서 집안일을 거들고 동생을 챙겨야 했습니다. 영구임대 아파트 단지 사이에, 청약 당첨으로 엄마의 명의가 된 주공아파트 18평 집이 그나마 우리 집의 전재산이자 자부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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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소설 속 주해처럼 H는 막 이사한 자기네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옆 단지 친구였던 H가 멀리 이사를 가서 한편으론 좀 서운했던 차였습니다. 먼저 베풀어준 H의 초대에 신이 나서 적당한 호기심으로 친구네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H가 먼저 들어간 집을 뒤따라 들어갈 때부터 저는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지금 제 기억에는 그 집으로 가는 길이나 이웃 집들의 풍경이 전혀 생각나지 않아요. 덩그러니 서 있는, 비닐로 적당히 가려둔 어두운 판잣집이 친구의 집이었어요. 학교에서는 내색을 전혀 안 했던 H의 집 사정이 더 어려워진 게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초대해준 건 '믿는다'는 의미 같았어요. 누구에게도 H의 사정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비밀 서약 같은 마음을 다짐하며 H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평소와 똑같이 한참 수다를 떨고, 친구가 끓여준 라면도 맛있게 얻어먹고요. 처음이자 마지막인 초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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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때의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는 굽이굽이 골목길을 들어가 맨 끝에 자리잡은 한옥을 개량한 집에서, 주인집 할아버지, 할머니, 별채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계신 한 집의 가장 끄트머리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살았습니다. 화장실이 푸세식인 오래된 집이었어요(한밤중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을 가는 게 가장 무서웠죠). 연탄을 때는 집이었고 마당 수돗가에서 씻어야 했고, 겨울엔 따뜻한 물을 끓여 부어주는 엄마의 손길에 기대어야 했죠(예전엔 회사 선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체 몇 년생인 거냐고 웃었는데요).
골목만 나가면 전봇대 앞에 있으면 옆집 언니와 슈퍼집 남자아이들과 집이 어딘지 모르지만 아무튼 한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몰려나와 해가 질 때까지 같이 고무줄, 비석치기, 얼음땡 하며 왁자지껄 놀았습니다. 학년 차 상관없이 마을 아이들이라면 다 누군지 알던 시절이었습니다.
막 93년 대전엑스포를 앞두고 신도시 아파트가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대전 동구에서 서구로,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동생과 제가 같이 쓸 수 있는 작은 방이 있었고, 로망인 2층침대를 사준 부모님 덕분에 엄청 행복했습니다.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나서야, 한 반 친구들 중에서도 어느 아파트에 방이 몇 개짜리 집에서 사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저 부럽다 정도였지, 내가 사는 집을 감추거나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H의 집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도록 집 안 어른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우리는 충분히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죠.
어느새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고, 부동산 뉴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투기'라는 말 대신 '투자'라고 합리적인 말을 하면서 호재에 따라 하루아침에 몇 천, 몇 억이 올라가는 아파트, 서울 동네를 바라보는 저의 시선도 많이 변했습니다. 내가 일해서 버는 돈보다 아파트가 버는 돈이 훨씬 빠르다며, 대장주 아파트를 외치는 사람들 옆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그럼, 돈을 벌려면 부동산이지.
학교에서 '남토(남일동 토박이)'라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던 홍이는, 수아가 학교에서 '남민(남일동에 사는 난민)'이란 말을 들었다는 말에 분개합니다. 뚜렷이 보이는 차별에는 저도 함께 분개합니다. 그런데 정작 수아의 엄마 주해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남일동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그 옆 동네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초등학교가 집과 더 가깝다고 학교에 민원을 넣고 항의를 해서 가까스로 수아를 보낸 주해의 입장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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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 씨, 내가 그 학교에 수아를 넣을 때 이런 일을 생각 안 했겠어요? 홍이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알아요. 그렇다고 내가 학교에 가서 따지면 나아질까요? 아뇨. 그랬다면 남일도니 난민이니 하는 말들도 처음부터 생겨나질 않았겠죠. 여기 개발되고 우리 아파트로 이사하면 나아질 거예요. 여기 남일동 일대가 달라지면 이런 일도 더는 없을 거고요. (p.138~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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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의 자서전>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쳐온 집들과 동네를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재개발이 될 동네, 사라질 동네들이 계속 생겨나는 지금, 불안으로 내몰리는 사람들과 주류로 편입하기 위한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절박함 등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재개발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윤리적인 얘기가 아니라 구별짓기, 그걸 넘어서지 못했을 때의 자기모멸이나 모순 등 사람의 여러 내면에 대해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님의 인터뷰를 덧붙여 읽었습니다. 여러 집을 옮겨 오면서 삶을 점차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안도도 잠시, 그 사이에 제가 잃어버린 것은 친구에 대한 기억뿐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리운 친구, H의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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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 만화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 1, 2 (고블)
드디어 2권이 출간되었습니다! 1권이 2023년 8월, 2권이 2025년 2월 출간입니다. 1권이 372쪽, 2권이 470쪽에 달합니다.
저는 그냥 소리 질러 외치고 싶어요.
"읽어!!! 읽어요!!!! 이걸 보란 말이야~~~!!!!!!(앜ㅋㅋㅋ)"
때는 머지 않은 미래, 식량 위기로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의 시대에, 철조망이 둘러진 외딴 마을 만신나루에 모여 사는 스무 명 남짓의 여자들이 있습니다. 마녀로 불리는 여자들. 식물, 동물 등 생명력을 남다르게 키우는 능력을 가진 여자들. 죽어서도 숲이나 호수가 되어 존재하는 여자들.
동네 유일한 약사인 산이는 5년 전 행방불명된 '초원'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그러던 중 기자 '송주'가 산이와 마주치고, 오래 전에 중단되었던 만신나루 계발계획이 재개되면서 서서히 산이와 마을을 위협해오기 시작하는데...
2권이 출간된 기념으로 다시 1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몰입감이 장난 아닙니다. 아 정말.. 산호 작가님은 어떻게... (부들부들) 이 아름다운 작품을 빠른 시일 내에 꼭 읽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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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이 가라앉으면서 달력은 무심하게 넘어간다.
하지만 시간은 숫자만으로 흘러가지 않는 듯해.
작았던 나무 그늘은 점점 넓어지고,
알에서 거위가 깨어나고,
어린애가 계절마다 허물 벗듯 자라고,
관심 밖의 울타리는 신록의 몫이 되고,
모든 것을 자라게도 하고 부서지게도 하는 시간의 파랑 속에
시침이 아무리 굴러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불타고 말라 죽은 잎 사이에서
기어코 살아남은 열매가 익어가는 일.
벌레 먹고 비틀어져도 맺히고야 만다.
살을 그으면 핏방울의 새듯.
그리고 세상 천지에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지.
우리는 그 살아남은 열매로 살아남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
(p.461~465,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 2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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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그래 <엄마만의 방> 베트남어판 출간!🍀
이렇게나 빠르게 책이 도착할 줄 몰랐습니다. 계약과 동시에 준비된 출간 진행.
한국보다 좀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표지로 <엄마만의 방>이 출간되었습니다.
특히 책 속 주인공, 김그래 작가님의 어머님이 여전히 베트남에서 일을 하고 지내고 계셔서 책 속에서 베트남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인물들이 매우 신기하기도 하고, 부디 베트남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기를 손모아 기원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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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 EP127. 가짜노동 하는 관료사회 고발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사이드웨이 박성열) [커피타임]
"한국 공직사회와 공무원에 관한 폭탄과 같은 책이 출간되었다."
근데 그게 대표님이 던진 폭탄은 아니고, 노한동 작가님이 던진 폭탄을 전달하기만 했다고요? ㅋㅋ 출간 한 달 만에 10,000부(녹음 이후 12,000부) 날개 돋힌 듯 팔리는 지금 가장 핫한 책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을 두고 사이드웨이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더불어 출판사 8년, 어떠세요?
사이드웨이 대표님 : 지. 쳤. 다.
1인출판사는 가짜노동은 없고 진짜 노동만 해요.
그럼에도 우리가 가는 그 길이... 맞는 거겠죠?
노한동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사이드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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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에디터리 책장터리> 2월 산책 + 추천책
2월의 네 번째 영상(위트보이 피디님의 기세가 무섭습니다 ㅋㅋ)이 올라왔습니다.
사는 속도에 힘입어 책도 무섭게 읽고 있었는데요, 3월부터는 네.. 본업에 책 만드는 일에 다시 돌입할 예정입니다 ㅎㅎ 방학이 끝났네요.
[2월에 산 책]
[에디터리 추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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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한 소식.
유유히가 부스로 도서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025 서울국제도서전 부스에서 만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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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유유히 레터는 여기까지입니다.
아래 답장하기 버튼을 누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게시판이 열려요. 보다 쉽게, 서로의 피드백을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위트보이와 에디터리의 답장도 그 밑에 답글로 달아둘게요. 이번 주 답장도 잘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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